<이 글에는 넷플릭스 드라마 그레이스에 대한 약간의 스포일러가 담길 수 있습니다.>
출처: https://revengeoftv.blogspot.com/2017/11/alias-grace-murderess.html
"나에 관한 모든 글을 떠올려 본다.
나는 신경질 적이다.
나는 미천한 신분에 비해 교양이 있어 보인다.
나는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라 나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사람이 없다.
나는 교활하고 기만적이다.
나는 머리가 모자라 바보와 다를 바 없다."
"정말 궁금하다. 어떻게 동시에 이렇게 다른 것들이 될 수 있을까?"
동시에 다른 모습들을 간직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 어떤 이들은 이러한 예측 불허의 모습에 매력을 느끼기도, 어떤 이들은 예측하기 힘든 모습을 보며 두려움을 느끼기도 한다. 그레이스에 대한 평가는 이렇게나 미지의 것으로 남아 있다. 그는 신경질 적이지만 착한 아이이며, 교활하고 기만적이지만 바보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이는 모두 그를 둘러싼 이야기일 뿐이다. 그레이스 그는 본인 스스로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 하고 있을까? 적어도 드라마에서는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는 그의 의견을 묻는 모든 대답을 피한다. "제가 당신에 대해 나쁘게 평가를 해도 상관 없습니까?"라는 정신과 의사의 질문에 그는 "전 벌써 판결을 받았어요. 박사님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시든 결과는 같아요." 라는 대답을 할 뿐이다. 타인들이 내린 평가에 의해 그의 모든 것이 좌우 된다는 것을 깊이 깨달은 듯 했다.
그는 실제로 드라마 중간중간 '신경질 적인' 모습을 보이곤 한다. 평소 그레이스의 모습과는 조금은 결이 다른 감정선이라 가끔 당황스럽게까지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드라마가 끝난 뒤, 그가 보인 제2의 자아의 형상을 보고 난 뒤에는 그의 갑작스런 감정선이 전혀 당황스럽지 않다.
갑작스럽게 솟구치는 신경질적이고 싸늘한 표정은 그의 정신이 이상해서, 혹은 갑자기 기분이 순식간에 바뀌어서도 아니다. 그냥 그것이 그의 모습이었다. 그의 '본 모습'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아무튼 우리가 그에게 '원했던' 모습이 아닌 그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그 인 것이다.
드라마는 진행되는 내내 어떤 남성들에 의해 희생되는 여성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레이스는 끝내 죽음을 맞이한 자신의 첫번째 친구의 모습과, 점점 폭력의 그늘이 드리워지는 자신의 상황을 보며 무엇을 느꼈을까. 아마도 그는 표면적으로는 '시녀 주제에 집주인과 놀아나며 안주인 노릇을 하는' 낸시 몽고메리를 혐오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내면 깊은 곳에서는 '똑같이 집주인과 놀아났지만 처벌을 받은' 친구 메리의 모습과 같은 결말을 얻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같은 행위를 했지만 누군가는 상을 받고 누군가는 벌을 받는 것'이 불공평하다고 말했지만, 결국 그것 역시 남성의 힘 아래에서 상과 벌을 받으며 휘둘리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그는 느꼈을 것이다.
자신의 운명이 타인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아니, 슬픔을 넘어서 비극적인 일이다. 나에게 주어지는 권력이 '타인을 유혹함으로써' 얻어지는 권력이며, 이 종이 낱장보다 못한 권력이 마치 대단한 특권인 것처럼 모두가 이야기 하는 세상에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그레이스에게 이 세상은 그 자체로 기만적 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레이스는 다행히 '교활하고 기만'하여 '바보처럼' 행세했다. 본인이 세상에게 원하는 것은 절대로 말하지 않았다. 그저 남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리고 그대로 말하고 행동해 주는 것으로 그의 역할을 다했다.
그의 남편이 그를 용서해 달라고 했을 때에도, 그의 의사가 자신을 믿어달라고 했을 때에도. 그레이스는 용서해 주었고, 믿어 주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레이스는 그와 정 반대의 이중적인 모습을 갖고 있었다. 본인은 분명 잠에 들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최면에 걸린 그 사이에 그가 보인 모습은 분명 그 자신이었다.
구경꾼들은 혼령이 들어 저런 것이라고, 혹은 저 여자가 미쳐서 저러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그는 전혀 미치지 않았다. 그렇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 여성에게 '미쳤다'고 말한다. 혹은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온전히 보여주는 데 실패해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는 여성에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그렇게 그녀들은 마녀라고 불리우며 십자가에 매달려 불타 죽어갔다.
"여자들은 무서워"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결혼 전에는 참하고 착했던 내 여자친구가, 아내가 되고나니 누구보다 무서운 사람으로 변했다. 혹은 내가 좋아할 때는 누구보다 깨끗하고 선해보였던 여자가 사귀고 나서 보니 누구보다 여우가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은 여자들의 이중적인 모습을 보고 무서워한다. 마치 "자신을 유혹하려고 다가온 저 여자가 사실은 내 간을 빼먹을 구미호"가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휩싸인 듯한 모습이다.
하지만 그들이 과연 선과 악을 동시에 가진 이중적이고 교활한 사람일까? 그저 우리가 원하고 상상했던 모습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저건 내가 알던 그녀의 모습이 아니야" 라고 말하며 무엇이 진짜 그의 모습인지 알기를 거부했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그들은 '선'한 사람이었는데 '악'한 모습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악'한 사람들에게 '선'이라는 가면을 써야만 한다고 계속해서 말해왔던 것이다. 그리고 사실은 그 '악'이 악이 아닌, 그저 그들의 본래 모습이자 그들이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진실이었을 것이다.
이 드라마는 19세기를 배경으로 이루어진 드라마이다. 100년도 넘는 세월 사이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사회가 원하는 여성의 모습에는 과연 무엇이 바뀌었을까?
사회가 나에게 기대하는 모습과 내 실제 모습이 계속해서 충돌해 갈 때, 우리는 그 무엇에서도 안식처를 찾을 수 없다. 내 모습이 아닌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과 내 진실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 그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다보면 인생은 이미 저 멀리 스쳐가 있다.
그리고 그 줄다리기를 하는 모습을 우리는 '여자의 이중성'이라 부르며, 때로는 유머의 소재로, 때로는 공포의 소재로 삼으며 유희한다. 하지만 그 안에서 고군분투하는 수 많은 그레이스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사형선고를 받거나, 이 선고를 피하기 위해 기만적으로 자신과 세상을 속이며 살아간다.
하지만 진짜 기만적인 것은 누구일까. 사형선고를 내리는 우리인가, 자신의 진실과 동시에 살아갈 힘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아슬아슬하게 버텨가는 그들인가. 아마 그 누구도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는 없을 것이다.
'리뷰 > 영상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나리> 무슨 일이 다가와도 버리지 않을 마음으로 (0) | 2021.03.25 |
---|---|
<블라인드> 너가 아니면 안되는 단 한가지 완벽한 이유 (0) | 2021.03.24 |
<경계선> 세상의 경계선을 무너뜨린, 나를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0) | 2020.01.04 |
조커 <JOKER>, 범죄 옹호 영화인가 vs 하나의 예술 작품인가 (0) | 2019.10.04 |
헤어나올 수가 없던 너라는 늪에서 - 퀵 샌드 (QuickSand), 나의 다정한 마야 (0) | 2019.04.2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