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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콜콜한 이야기/몸과 마음

부둣가에 앉아서 눈치를 보다: 통영 기행 3편

by 윤춘 2021. 5. 2.

부둣가에 한 여자가 앉아있다. 바닷가가 아니라 반대편 도로를 향해 가부좌 자세를 하고 앉아있다. 주위엔 개들이 열심히 짖어대는 소리만 들릴 뿐.

 

눈을 감고 숫자를 세며 숨을 들이 내쉰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번쩍

 

이내 열을 세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눈을 뜨고 도로를 확인한다.

 

도로 위를 걸어가는 할머니. 

 

하나.. 둘.. 셋.. 

 

이번엔 다섯도 세지 못한다. 아예 라디오를 켜고 걸어가는 한 중년의 남성. 

 

그녀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것일까. 열까지는 다 세고 부둣가를 떠날 수 있을까.

 

 

 

 

 

오랫동안 혼자였다. 그렇게 많이 다닌 여행의 대부분은 혼자 떠나고 혼자 돌아왔다. 먹는 것도, 자는 것도, 노는 것도, 걷는 것도.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아직도 미지의 것이라. 

 

오랫동안 남의 마음을 살펴보았다. 혹시 이 무리에 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나, 너의 기분이 혹시 안 좋은 것은 아닌가, 친구가 내 말에 기분이 나빴나. 유난스럽게도 남을 챙기고, 감정을 살피고, 책임을 지려한다. 잘하지도 못하면서.

 

나는 언제나 나를 짝사랑하는 중이다.

마음은 나를, 시선은 타인을 향할 때, 내 사랑은 너무 아픈 사랑이 되어버린다. 

 

짝사랑이 환상으로 시작해서 환상으로 끝이 나듯, 나에게는 타인을 향한 마음 역시 환상으로 시작한 짝사랑이다. 때로는 그 환상이 맞을 때도 있고, 틀릴 때도 있다. 절대 답을 알 수 없는 이 환상퀴즈는 죽을 때까지 끝도 나질 않는다.

 

그렇게 이 '눈치게임'이라는 것은 나에게는 절대 답을 알 수 없는, 그러나 계속 스스로 문제를 만들어 답변까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미궁 속의 숙제였다. 

 

이 답 없는 숙제를 도대체 왜 하는가. 이유는 모른다. 아니, 이유는 수백수천 가지라도 댈 수 있지만 그것 역시 답이 없는 환상게임인 것을. 

 


어느 해, 봄이 열린 날, 자신의 아버지의 얼굴을 똑 닮은 한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나름의 풍파를 겪으며 중년의 나이가 되신 아이의 할아버지는 작은 아이의 눈망울을 보며 자신의 아들에게 말했다. 크게 될 아이이니 잘 키워라.

 

이후로도 할아버지는 이 아이가 자신의 어머니를 닮았다며, 저 눈빛, 저 얼굴, 아침 일찍 일어나서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저 행동, 어떻게 저렇게 똑 닮을 수가 있냐며 온갖 그리움과 사랑을 쏟아냈다. 

 

그녀가 태어나기 전까지,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단 한 번도 인정의 눈빛을 받아본 적이 없던 아들은 그렇게 자신의 모든 사랑을, 모든 기대를, 모든 마음을 그녀에게 걸었다. 

 

그녀는 사랑받는 것에 익숙했다. 받아본 만큼 배움도 늘어나는 것이다. 그녀는 사랑받는 방법을 너무 잘 알았다. 적당한 애교와 적당한 차가움의 수위를 알았다. 제 아버지가 어떻게 하면 자신을 무서워할지를 너무 잘 알아서, 때로 어머니는 그녀가 무서웠다.

 

욕심이 많고 사랑을 받을 줄 아는 아이가 보잘것이 없어지면 한 없이 비굴해지는 법이다. 미움받는 법을 배우질 못한 채 사회에 던져진 아이는 처음으로 무력했다. 그리고 그녀가 택한 전략은 겨우 웃음. 보잘것없는 웃음 한 장. 

 

자신을 팔아, 웃음을 빌어, 사랑을 얻었다. 정확히는 사랑이 아니라 미움을 받지 않는 법을 배웠다. 절대 미움받는 일이 없는 아이로 자라나길 선택한다. 웃고, 웃고, 또 웃는다. 그렇게 그녀는 '착한 아이'가 되었다. 

 

사랑받고 욕심 많던 아이가 착한 아이가 되자 그녀는 눈치라는 것을 기르기 시작한다. 누군가와 갈등이 생기면 더 착한 친구가 앞장서서 그녀를 보호해준다. 이 아이는 절대 그런 짓을 할 아이가 아니라고, 이 아이가 그런 행동을 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누군가 그녀를 미워할 만한 어떤 사건이 생기면 재빠르게 빠져나가는 방법을 자기 자신도 모르게 알고 있다. 상황을 살피고, 본능적으로 피해나가며 그렇게 자신의 욕심을 채워나갔다. 그렇게 살아남고, 자신을 죽여가며, 사랑을 얻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쯤, 이미 소녀는 무엇이 자기의 감정인지 자기의 인생인지 자기가 누구인지, 모든걸 잃어버렸고. 너덜너덜한 마음에 누군가 가끔 관심이라는 먹이를 주는 것으로 제 마음을 연명하고 살아간다. 그러다가 자아라는 게 찾아오는 순간에는 갑작스럽게 자기가 먹고 싶은 걸 먹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이 곳을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땡깡을 부리는 것이다. 그게 그냥 자신의 전부인 것이다.

 


 

내 아픈 사랑에 어떤 변명을 대고 싶지는 않다. 아픈 사랑도 사랑이었음을. 모두 내가 원해서, 내 자존심에, 어떤 것도 손해보고 싶지 않다는 알량한 욕심에 택한 방법이었음을. 

 

그 부둣가에서 나에게 말을 건 사람은 정작 아무도 없었다. 할머니도, 라디오를 듣던 아저씨도. 다들 제 걸음으로 발소리를 내고 있었을 뿐이다. 나에게 말을 건 사람은 나뿐이었다. 불안하다고. 누군가 나에게 이상한 사람이라고 할까 봐 불안하다고 내가 나에게 말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나는 지금까지 누구와 사랑을 나눈 것인가. 한 번이라도 그들이 말을 건 적이 있었나? 나를 사랑했던 많은 이들은 과연 내가 그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었기 때문에 나를 사랑했던 것일까? 

 

정작 태어나서 지금까지 나를 사랑한 것은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닌 나 자신이었는데. 내 사랑에 대한 응답은 언제나 남을 향한 구걸이었으니.

 

이제라도 나를 본다. 

찰나의 웃음보다, 얄팍한 인정보다, 터무니없는 사랑보다 먼저인 마음이 있다는 건 절대 환상이 아니다.

 

그제서야 보인다. 나도 마음이 있듯이 다른 사람들도 마음이라는 게 있었다는 걸. 내가 미움받지 않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너와 나의 마음, 그리고 모두의 행복뿐이라는 걸. 그리고 그 행복을 위해 그 누구도 아닌 나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라는 게 있다는 걸. 이제야 안다. 

 

세상에서 가장 눈치가 빠른 사람은 상황을 잘 살피는 사람도, 남의 마음을 잘 아는 사람도, 계산이 빠른 사람도 아니다. 제 마음을 가장 잘 알고, 언제 자신이 자기 다운줄 알아서, 매 순간 나로서 빛나는 사람은 모르는 것이 없다.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진실을 안 사람이 더 이상 알아야 할 것은 없다. 그래서, 결국은 제 모습으로 사는 사람만이 살아남는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 살아남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사실이다.

 

 

숙소 앞 부둣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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