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무지 벌레라는 종족은 봐도 봐도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왜 그렇게 나랑 다르게 생긴 거야? 도대체 어디로 날아갈지를 모르겠는 그 날갯짓은 세상 무엇보다 예측 불가한 일이다.
한 번은 방충망에 엄지손가락만 한 벌레가 붙어 있는 것을 보고 기겁을 하며 밖으로 내보내려 한 날이 있었다. 이런 말 하기 참 남사스럽지만 그 당시 나는 모기도 손으로 잡질 못했다. 뭔가가 내 손에서 터지는 느낌이 너무 싫었다. 그런 사람이 거대한 벌레를 보고 제정신이었겠는가?
두 시간을 싸웠다. 이 아이를 어떻게든 손대지 않고 창문 밖으로 내보내려 했다. 창문을 닫은 뒤 방충망을 열어 놓고 기다렸다. 소용이 없다. 용기를 내서 책으로 잡아보려 애를 써보았다. 도저히 이 아이를 터트릴 자신이 없다.
결국 동생이 벌레를 잡아주고 사건은 일단락이 되었다.
그리고 생각에 빠졌다. '앞으로 이런 일이 생기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치열하게 고민한 결과, 나는 전기 파리채라는 존재를 알게되었다.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하게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백방으로 알아보고 검색을 한 뒤, 최종적으로 단순히 휘둘러서 잡는 테니스채와 같은 형태의 파리채보다는 머리를 90도 돌려서 벽에 붙은 벌레를 딱 가두어 잡을 수 있는 것이 최적의 살충기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어느 날은 아는 언니네 집에 들러서 밥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벌레가 들어와 말썽을 부렸다. 언니는 아주 긴박하게 남자 친구에게 말했다.
"익스큐터 어딨어 익스큐터 가져와!"
익스큐터가 뭐지..? 잠시 고민했다. 익스큐트를 하는 사람인 것 같은데.. Execute.. 집행하다.. 사형하다!
사형 집행인, 사형기를 의미하는 단어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내 언니의 남자 친구가 들고 온 사형기는 바로 그 전기 파리채였다. 내가 산 것과 똑같이 90도로 머리가 돌아가는 똑똑한 전기 파리채.
기가 막힌 작명에 한참을 웃었다. 어찌나 강렬한 이름이었던지 그 뒤로 집에 벌레가 찾아올 때마다 '익스큐터 가져와 익스큐터!' 라며 혼잣말을 하고 아주 시원하게 벌레들을 잡았다.
이 사형기는 내 삶의 질을 올려준 top 5 아이템에 들 정도로 아주 유용했다. 1년에 한 번씩 아주 커다란 벌레들이 집에 들어올 때마다 아주 약간의 트라우마만 남기고 단번에 괴물들을 해치울 수 있었다. 심지어 한번은 엄지손가락만한 벌레를 사형시키고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는 도 중 바로 옆에 또 다른 종류의 엄지손가락만한 생명체가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한 적도 있었다. 하루에 두 번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지만, 내겐 익스큐터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유학을 가면 챙겨야 할 물건을 상상할 때 마다 이 사형기를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서양은 벌레가 참 크다던데.. 이건 무조건 가져가야지. 공항에서 빼앗기지 않게 꼭 수화물로 부쳐야지.라고 적어도 10번은 넘게 다짐했다.
그리고 지금, 이 사형수는 여전히 내 옆에 누워 아주 듬직하게 나를 지켜주고 있다.
벌레라는 존재는 언제나 나에게 많은 고뇌를 안겨준다. 나는 언제부터 그들을 무서워하게 되었나. 혹시 내가 '친구들이 콩을 싫어한다는 걸 목격한 이후로 콩을 싫어하게 된 마법'처럼, 벌레에 대한 혐오 역시 사회적인 반응을 답습한 결과는 아닐까, 원래 나는 벌레라는 친구들을 아주 좋아했던 사람은 아니었을까, 심각하게 고민해본 적도 있다.
하지만 생각은 생각이고, 감정은 감정이다. 여전히 예측불허의 벌레의 날갯짓은 너무 무섭다. 생긴 것도 예측이 안되고 하는 짓도 예측이 안된다. 마치 검은 우주나 심해의 사진만 봐도 거대한 이질감에 숨이 막히듯이, 매일 목격하는 벌레는 사소하지만 그 무엇보다 생생한 두려움이다.
이렇게 여느 때와 같이 벌레에 대해 심각하게 고뇌를 하던 와중, 아주 신기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사형기가 나에게 온 이후로 벌레에 대한 두려움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집 밖에서 사형기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순간에도 나는 벌레를 '예전만큼'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다. 심지어 손으로 모기도 못 잡던 사람이 이제는 턱턱 모기를 터뜨린다.
잠시 생각의 회로가 멈췄다. 이래도 되는 건가? '언제든지 손쉽게 죽일 수 있다'라고 생각하자마자, 그렇게 쉽고 하찮은 존재로 전락시켜버린다는 게, 괜찮은 일일까?
기술철학자인 브뤼노 라투르는 기술이 인간의 목적에 의해서만 사용되는 피동적인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어떤 행위를 하는 행위자(actor)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동시에, 기술이 인간의 행위 자체를 좌우하는 결정자도 아님을 강조한다. 즉, 기술과 사람은 만나는 동시에 서로가 서로를 변화시키는, 상호작용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총기가 허용되면 미국에서 발생하는 총기 사고와 똑같은 비율로 총기 사고가 일어날까? 총기가 사람들로 하여금 살인을 쉽게 만드는 것이라면 총기 사고의 비율은 똑같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 '사람'과 한국 '사람'의 문화와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아무리 총이 살인 횟수를 늘여도 그 영향은 조금씩 다를 것이다. 어쩌면 한국 사람들이 더 화가 많아서 총을 많이 쏠 수도.. 있고 혹은 상대적으로 조용한 성격으로 인해 총을 덜 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도구의 발견은 사람의 욕망을 더 극대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동시에 극대화된 욕망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는 개개인의 선택에 달렸다. 사실 애초에 도구를 만드는 것 자체가 내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서가 아닌가? 하지만 욕망은 커질수록,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세상을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그만한 책임 역시 따르게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내가 선택한 나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내가 전기 파리채를 휘두름으로 인해 따라오는 책임은 무엇일까? 벌레를 더 많이 죽이기 때문에 지구 온난화가 더 가속화될까? 전기를 더 많이 쓰기 때문에 건전지 사용으로 인한 환경오염이 더 발생할까? 겨우 모기를 더 빠르게, 피를 묻히지 않고 죽일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큰 잘못인 것일까?
다만 나는 전기 파리채의 등장으로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하나 잃어버렸다는 정도의, '나를 기분 나쁘게 하는 것들은 언제든지 죽여버릴 수 있다'는 섬뜩한 권력에 힘을 실어주었다는 정도의, 앞으로 내가 존중하지 않을 생명의 수가 더 늘어나게 될 것이라는 정도의 대가를 치렀을 뿐이다.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무언가를 죽일 수 있다는 것, 그리고는 '나는 벌레 한 마리도 손으로 못 죽이는 사람이야'라고 온갖 순수한 체까지 할 수 있다는 것, 이런 의미에서 우리 사형수는 참 여러 가지 욕망을 심층적으로 실현시켜주는 참된 인간의 도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말 한마디로 사람을 죽인 뒤 '아무것도 몰라요'라는 표정으로 고결하고 순수한 마음가짐마저 잃고 싶지 않아 하는 비열함에 대해서는 비난을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가끔 이러한 '신박한' 도구들을 볼 때면, 그리고 그걸 누구보다 잘 이용하고 있는 지경을 보면 참 내가 누굴 욕할 처지가 되나 싶다.
한 가지 고민이 더 늘어났다. 이 글을 하나 썼기 때문에 나는 전기 파리채를 쓰지 말아야 하는 건 아닐까? 이렇게까지 욕을 하고 옆에 누워있는 전기파리채를 보고 다시 가슴 한켠이 든든해지는 건 참 괴기스러운 일이 아닐까? 근데 내가 전기파리채를 포기할 수는 있을까..? 역시나 오늘 도 잘 모르겠다. 이건 정말이지 잘 모르겠다.
아, 이건 하나 알겠다. 무슨 전기파리채 하나 가지고 이렇게 심각하고 긴 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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