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월든>에 빠져있다. 현대 문명이 제공하는 수많은 욕망 중 진짜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과연 얼마나 될까하는 의문에서 시작한 그의 여정은 법정 스님을 비롯하여 많은 현대인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오롯이 자신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남이 아닌 나의 감각에 초점을 둘 수록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은 점점 실체가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 수행이 지속 될수록 나의 몸과 정신을 유지하는 데에는 사실 그렇게 많은 돈과 물건이 필요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든다.
벤에서 생활하며 떠돌이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노매드랜드>를 기다리며 월든을 읽고 있으니, 나도 내 몸에만 집중하며 최소한의 물질로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출가를 하면 어떤 기분일까, 나도 소비를 많이 하지는 않는 사람인데, 역시 현대인은 너무 원하는 게 많아.
그리고 영화 시간이 다 되어 상영관으로 가는 도중, 연예인 공유의 입간판이 웃으며 절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걸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그를 따라 흐뭇하게 웃었다.
다시 깨달았다. '역시 출가는 무리겠군'
이토록 욕망이 많은 사람이 무소유를 실천하는 것이 가능할까. 기분 따라 며칠 동안 돈을 안 쓰다가도 갑자기 댓바람이 불면 지름신이 제 정신을 지배하는 사람이 무소유를 하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참회가 필요할까.
공유님을 따라 웃고나니 찾아오는 허망함. 그리고 드는 생각.
'모든 이론가의 이론은 사실 개인의 성격이 반영 된 것이 아닐까'
어쩌면, 법정 스님이 무소유를 실천 하실 수 있었던 것도, 월든이 속세를 벗어나 산속에 나무집에 살 수 있었던 이유도, 다 원래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아마 뭔가를 사용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하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거나, 물질 양식보다는 정신적인 양식을 더 좋아하는 성격이기 때문에 그런 수행을 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이런 생각도 든다. 어쩌면 공산주의를 좋아하는 사람은 타인과의 관계나 협동을 매우 중요시 하거나, 노동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거나, 남을 돕는 걸 좋아하거나, 등등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공산주의를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자본주의를 좋아하는 사람은 제 욕망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거나, 타인과의 협동이나 나눔보다는 자기만의 울타리가 매우 중요한 사람이거나, 등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를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과연 이론가의 이론만 그럴까. 사람들이 주장하는 모든 말은 사실은 개인의 '바람'에서 나온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사람은 일을 해야 한다'는 말은 결국 '일을 하는 사람이 좋아'라는 말이 아닐까,
'사람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결국 '남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 싫어'라는 말이 아닐까,
'사람은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는 말은 그냥 '사람을 죽이는 사람이 싫어'라는 말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애초에 사람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군가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태어난 것이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스스로 선택하여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을 죽이면 안된다'와 같이 대부분의 사람이 옳다고 생각하는 말 역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람을 죽이는 사람을 싫어하기 때문'에 모두의 동의를 받을 수 있었을 뿐인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이유를 갖다 대도 세상에 '해야 하는' 일은 없지 않을까, '하지 말아야'하는 일은 세상에 없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어쩌면 세상에 존재하는 '해야 하는 일'을 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냥 단지 타인과 잘 지내기 위해서, 타인이 미워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행동하기를 선택한 것일 수도 있겠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미워할 때 감당해야 하는 것이 조금 무서워서, 그냥 하고 마는 것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만약, 모든 당위적인 말이 그저 한 사람의 '바람'에 불과하다면, 세상에는 '옳은'일이 있을까?
세상에 '옳고 그름'이 없다면, 어떤 일이 좋은 일이고, 어떤 일이 나쁜 일이라고 판단할 근거는 무엇이 될까?
그래서 삶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다고 생각한다.
오로지 행복한 삶과, 불행한 삶이 있을 뿐이다.
옳음과 그름이라는 단어에는 위계질서가 있다. 그름 위에 옳음이 있다. 옳음을 선택한 사람은 그름을 선택한 사람을 밟아 뭉개버려도 괜찮다.
하지만 옳음과 그름이 없다면, 삶을 판단할 수 있는 잣대는 도대체 무엇일까? 객관적인 기준으로 평가할 수가 없다면, 과연 무엇으로 우리의 삶을 평가할까?
삶의 모든 '옳음'이 사실 한 개인의 '기호'에 불과했다는 것을 안다면, 내 삶을 향한 모든 질문이 달라진다. 질문에 대한 내 모든 대답이 달라진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문제는 결국 세상의 모든 지식을 끌어와 대답해야 한다. 하지만, 세상의 지식 역시, 내가 말한 것이 아니다. 내가 경험한 것이 아니다. 내가 받아들인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옳음'은 너무나 쉽게 바뀌고, 사라지고, 생겨난다.
하지만 좋고 싫음을 따지는 문제는 오로지 내 마음에서만 답을 찾을 수 있다. 그 답이 나오는 과정은, 그 누구도 그 어디에서도 강요하지 않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출발한다. 내가 좋은지, 내가 싫은지에서 출발한다. 좋고 싫음은 철저하게 '나'밖에 모른다.
오로지 자기 자신뿐이다. 그래서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자신의 삶을 평가할 수 있다.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마음을 대신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직 나 자신만이, 나의 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이 평생을 짊어져야 할 단 하나의 책임은 바로 자신의 마음이다. 이 책임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 내가 내 마음을 알고 행하여, 펼쳐지는 나의 길에 머뭇거림이 없을 때, 그 책임은 무엇보다 행복한 선물이 된다. 누구도 아닌 나 자신만이 주고, 받을 수 있는 그 선물이, 내 삶에 유일한 '옳음'이 된다.
어쩌면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의견도 하나의 주관일 뿐이다.
그저 자신의 감정을 뚜렷하게 아는 사람이 좋다. 그리고 남의 감정도 뚜렷함을 알아서, 타인에게 자신의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 사람이 좋다. 그저 나란히 걸을 수 있는 사람이 좋다.
모든 일에 옳음과 그름을 분별하는 사람이 싫다. 자신의 삶의 방식이 '옳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싫다. 타인의 삶의 방식을 함부로 평가하는 사람이 싫다.
그리고, 가끔은 이렇게 말하고도 뒤돌아서 남의 생각을 이리저리 재단하고 있는 내 모습이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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