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버린 딸아이를 거두어 키웠다.
버스를 타고 어딘가를 가고 있는데 친구가 자신의 딸과 함께 버스에 탔다. 6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는 여린 머리카락들이 넘실대는 단발머리에 쌍꺼풀이 없이 큰 눈을 하고선 제 엄마의 앞자리에 앉았다. 어딜 향하는지 모르겠는 시선이 공허하다. 6살짜리 아이에게서 보여서는 안 되는 눈빛이었다.
친구는 잔뜩 화가 나있다. 아이에게 온 신경이 가 있지만 절대 이 아이를 돌보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자꾸만 먼 곳을 바라본다. 친구의 옆자리는 분명 비어 있는데, 아이는 엄마의 앞자리에 혼자 앉아있다.
그 자리에서 아이를 우리 집으로 데려와 키우기 시작했다. 너무 예뻐서 어쩔 줄을 몰라 아이를 안고 안고 또 안았다.
요즘은 술집에서 혼자 책을 읽으며 마무리 하는 하루를 즐긴다. 아주 가끔, 어떤 위로나 보상을 주고 싶을 때 그날의 기분에 맞는 책을 들고 가 맛있는 음식에 책 한 장 혹은 술 한잔을 곁들인다.
친구의 딸아이를 거둔 그 날엔 '딸은 엄마의 감정을 먹고 자란다'라는 책을 가져가 읽었다. 엄마가 심리적이던 물리적이던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할 때의 불안이 어떻게 딸아이의 마음에 전해 지는가에 대한 책이다. 어버이날을 기념으로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이다.
"가장 가까운 배우자를 통한 친밀감과 의존의 욕구가 좌절될 때, 여성들의 경우 가장 밀착이 쉬운 아이를 통해 그것을 해소하고자 하는 경향을 더 많이 보입니다."
"부모의 존재가 그 자체로 너무 강하고 압도적일 때, 아이들이 느끼는 두려움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 우리가 우리의 존재를 자각하고 의식할 수 있는 순간은 내 앞의 타자(부모)가 자신을 포기하고 나를 비추어 주고 반영할 때, 품고 받아들일 때입니다."
"존재감은 부모가 아이를 품고 자신을 지워서라도 아이를 존재하게 하는 데서 시작하고 발달합니다. 또한 어떤 압도적인 존재 앞에서도 내가 사라지지 않을 수 있다는 단단함과 균형을 경험할 때 자존감이 자리 잡을 수 있지요."
딸은 엄마의 감정을 먹고 자란다 (35, 46-47p)
심리학을 배웠으면서도 왠지 모르게 대중심리학 책은 '너무 가볍다'고 여겼다. 너무 쉬워서 내 마음을 한번 스치지도 못하고 날아가는 문장들로 가득했다. 그런데 요즘따라 그 말들이 하나하나 이해가 된다. 그냥 읽고 무슨 말인지 아는 것이 아니라, 진짜 내 상황과 내 마음 상태와 내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 문장들에 녹아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아마 나는 사람의 마음을 단 한 줄도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그 문장들을 모두 날려 보낸 모양이다.
엄마가 자신의 삶에 불안을 느낄 때, 그 불안은 딸아이에게 그대로 전달된다는 이야기. 그렇게 전이된 감정들은 딸아이가 독립된 인간으로 살지 못하고 엄마의 불안을 자신의 불안으로 만들어버리는 상태로 살게 한다는 이야기. 그리고 이 마음은 성인이 되어서 엄마뿐만 아니라 모든 외부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게 만들어 버린다는 이야기가, 들리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까지 사람 말을 열심히 들어?"
동아리에서 면접관으로 자리에 있었을 때, 동기가 나에게 이런 말을 건넸다. 아니 면접을 보는데 사람 말을 열심히 들어야지 그럼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나?
"그게 아니라, 너가 너무 집중해서 듣는 게 조금 무서웠어"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롭다. 왜 저런 이야기를 하나, 이 사람은 무슨 마음을 가지나, 참 세상에는 재밌는 이야기가 많다. 그래서 그냥 열심히 듣는 거다. 더 알고 싶으니까.
그렇게 열심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샌가 상대방은 자신의 마음을 더, 더, 더 열어낸다. 그리고 우리의 관계는 더, 더, 더, 깊어진다.
하지만 어느샌가 나는 저 멀리 도망간다. 왜인지 모르게 하루가 끝나면 두통과 피곤이 몰려온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직감도 없이, 쌓고 쌓은 이물감이 지속되다 갑작스럽게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 어린 시절도 있었다.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 자신의 세계를 미처 세워내지 못한 상태에서 타인에게 마음을 가지면 한도 끝도 없이 무너져 내린다. 엄마의 문제, 타인의 문제, 세상 모든 문제를 내 문제로 인식하여 궁금해하고, 해결하려 하고, 개입하려 한다. 그리고 이내 그러한 관심은 너와, 나와, 세상 모두에게 독으로 변한다.
애초에 뱉어내는 사람들이 원한 것은 해결도, 개입도 아닌 그저 '독백'이었을지도.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조금 들어달라는 신호였을지도. 아니, 그들이 원한 것이 무엇이든 간에 더 중요한 건 듣는 사람의 생각과 마음이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하필 그 책을 집어 들어 술집으로 향한 그 날, 그 책의 이야기가 이제는 들리기 시작한 그 날, 그리고 친구의 딸아이를 거둔 그 날, 나는 이별을 했다.
애인이면 애인, 친구면 친구, 가족이면 가족, 이별에는 어떤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그날의 이별에는 대상이 없었다. 어쩌면 세상 모든 것과 이별을 한 것일지도.
끊임없이 들려오는 이야기들. 계속해서 무언가를 말하는 뉴스들과 책들과 메시지들과 대화들. 그 안에서 나와 너의 경계선을 찾아본다. 세상의 문제들과 나의 문제를 분리시켜본다. 생각에도 물리적인 시간이라는 것이 소요되는 일이라, 너의 이야기에 어느 정도의 시간과 노력을 들일 것인가 역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애 처음으로 이별을 했다. 사랑이 나를 버리고 너를 살리는 것이라면, 이별은 너를 버리고 나를 살리는 것이라. 내가 살기 위해 너를 버렸다. 동의하지 않는 것은 따르지 않고, 마음이 편치 않은 사람은 만나지 않고, 몸이 지친 날에는 너에게 가지 않는다. 그렇게 나는 타인과 이별하고 나를 살려보기로 했다.
참 대단한 결심이다. 너무 기특해서 칭찬을 해주고 싶다. 이렇게 오기까지 참 고생이 많았다고.
그런데 정작 내가 살았다는 안도감보다, 너를 죽이고야 말았다는 죄책감에, 스스로 죽어왔던 자신에 대한 비참함에, 터무니없이 살아온 시간에 대한 허무함에 온몸이 아프다. 피곤해서 그런가. 비가 와서 그런가. 술을 먹어서 그런가. 한참을 앓았다.
그날 밤, 친구의 아이를 거두는 꿈을 꾸었다. 한참을 서로 껴안았다. 친구의 아이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을 만큼 사랑해 주었고, 길러주었다. 한 봄날의 꿈속에서 아이와 보낸 몇 년의 시간 동안 우리는 웃고 웃고 또 웃었다.
쌍꺼풀 없이 큰 눈을 가진 친구의 아이는 나의 어릴 적 얼굴을 빼닮았다. 그래서 그렇게 예뻐 보였나. 그래서 그렇게 버스에서 아이를 보자마자 집으로 데리고 왔나. 그래서 그렇게 안아주었나.
엄마의 문제를 자신이 해결해 주어야 한다고 발악을 했던 그 딸들은 지금 어떻게 자라고 있을까. 여전히 엄마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있을지도. 혹은 큰 결심을 하고 집을 나와서도 세상의 문제들을 지나치지 못하고 있을 지도. 그리고 어딘가에서 조용히 아파하고 있을지도.
하지만 아무리 아파하고 있더라도, 세상에 구원자는 자기 자신뿐이라. 내가 나의 어린아이를 보고 찾아주지 않는다면, 지나쳐온 마음을 스스로 보아주지 않는다면, 그렇게 열심히 들어주었던 타인들은 여전히 자신의 이야기만 나열할 뿐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정작 나에게도, 너에게도, 누구에게도 닿지 못하고 세상 어딘가로 날아가버린다.
세상의 많은 이야기 중 어떤 이야기를 들을 것인가, 어떤 이야기를 '내 것'으로 받아들일 것인가를 알 때, 아이는 비로소 어른이 된다. 스스로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그 책임도 오롯이 자기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를 찾는다는 것은 그만큼 대가가 따르는 일이다. 버려낸 것들이 자기 얘기를 한 번만 들어달라고 울고 불고 매달릴 때도 있다, 쳐 죽일 놈이라고 욕을 할 때도 있다. 가끔은 그것에 마음이 아프거나, 화가 나거나, 만사가 싫어지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버텨야 한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느끼고 경험하며 벼려낸 서슬로 계속해서 쳐내고 쳐내고 쳐내야, 비로소 살아남는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보다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것이 더 어려운 세상이다. 세상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무언가를 쏟아내기 바쁘다. 하지만 주는 대로 다 먹다 보면, 탈 난다.
그래서 '나'를 찾는 것은 단순히 자아성찰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인간이 채울 수 있는 가장 마지막 욕구가 아니라, 어쩌면 삶의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욕구를 지배하는 단 하나의 생존 방법일지도 모른다.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는 한 단계 한 단계를 밟아가며 채워나가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모든 것이 얽히고설킨 하나의 욕구였을까.
잘 모르겠다. 먹고살만하니까 이런 생각하는 거다 라는 말에는 또 할 말이 없다.
그래도 뭐, 어쨌든. 남들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안의 욕구는 그렇게 생겨먹었다. 그렇게 나에게 불어댄 말들 사이에서도 단 한 번도 흔들린 적 없던 나만의 욕구. 너무나 다행스럽게 단 한 번도 버리지 않았던 단 하나의 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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