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유퀴즈 온더 블럭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신께서는 주은 양에게 무엇을 넣어 주지 않은 것 같아요?"라는 질문에, "신께서는 저한테 남김없이 전부 다 주신 거 같아요"라는 대답을 한 어린아이가 화제였다.
그 당시, '신이 나를 만들 때'라는 질문에 많은 이들이 자기 자신을 한 통의 그릇에 비유한 재미있는 짤을 만들어낸 기억이 난다.
'신께서 나에게 무엇을 주고, 무엇을 주지 않았나'
구직 활동을 위해 자기소개서를 작성할 때, 내가 누구인지 도대체 알고 싶을 때, 남들에 비해 내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을 때, 우리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지표가 필요하다.
즉, 신께서 나를 만들 때 남들에 비해서 나에게 무엇을 '더' 주셨고, 무엇을 '덜' 주셨는지를 알아야, 나 자신을 알게 되는 것이다.
가만히 지켜보니 남들은 초록색을 좋아하는데 나는 빨간색을 좋아하네, 가만히 지켜보니 나는 남들보다 조금 더 관찰을 잘하는 것 같네, 남들보다 조금 노래를 못하는 것 같네. 하는 식이다.
사람의 '자아'라는 것은, 내적인 힘에서 길러지기도 하지만, 외부적인 환경 속에서 굴러가는 특성을 통해 길러지기도 하는 것이라, 사실 '타인'이 없는 '나'란 존재가 불가능하다. 애초에 세상에 '나'라는 세상 하나만 있다면 '자아'라는 게 무엇이 필요하단 말인가? 내가 빨간색을 좋아하면 세상 전부가 빨간색을 좋아하는 것일 텐데.
뭐, 그러다보니 가끔 우리는 타인과의 교류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내가 빨간색을 좋아하는데, 남들이 모두 빨간색을 보고 '빨갱이 색깔이야'라며 비난을 한다면, 더 이상 빨간색을 좋아할 수가 없다. 타인과 교류를 하는 우리가 매번 자신의 의견만 고집하는 것도 참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아이는 신께서 자신에게 '남김없이 다 주신 것 같다'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너무 자존감이 높아서, 자신이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몇 분 뒤, 진행자 유재석은 아이에게 "주은양은 꿈이 뭐예요?"라고 물었다.
아이는 자신의 꿈이 '환경미화원'이었다가, '사회복지사'로 꿈을 바꾸었다고 했다.
그 이유는?
"새벽에 일어나는 게 싫어서"
참 단순하다. 정말 세상물정 모르는 대답이다.
하지만, 누구보다 솔직하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분명히 한 답변이다.
'직업에 귀천은 없다'는 말은 누구나 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진짜 내 자식이, 혹은 내 자신이 환경미화원이 된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기꺼이 나를 응원해 줄 수 있을까? 연봉과, 직업에 대한 대우, 모든 것을 제쳐두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난 것을 선택할 용기가 과연 있을까?
청소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청소를 하는 것을 직업으로 가져보겠다는 생각을 해보진 못했지만, 그래도 한 번 상상을 해보기로 했다. 연봉이 아니라, 미래 전망도가 아니라, 사회적 위치가 아니라, 그저 청소를 하는 직업은 어떤 직업일까 상상을 해보기로 했다. 환경미화원은 그게 전부이니까. 세상의 많은 사다리 중 어딘가에 위치한 직업이 아니라, 그냥 청소를 하는 것 그게 그 일의 전부이니까.
새벽에 일찍 일어나기 위해 남들보다 먼저 침대에 눕는다. 9시쯤 누우면 새벽에 일어나기가 조금 수월하려나. 어둠 속에서 잠이 들고, 어둠 속에서 침대에서 일어난다. 채비를 하고, 가족들이 깰까 봐 간단하게 우유를 마시고 출근을 한다. 아파트 단지, 빌라 한 채마다 쓰레기가 한 더미씩 쌓여있다. 비우고 비운다. 가끔은 집게를 들고 다니며 길가의 쓰레기를 치운다. 내 손이, 내 집게가 닿은 곳이면 길가를 뒹굴며 시야를 방해하던 것들이 사라지고,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제 길을 간다. 눈 앞에 걸리적거리는 것이 없어 모두의 발걸음이 가볍다.
그냥 이게 전부다. 모든 직업은 그 필요가 있어 탄생한 것이다. 청소를 하는 사람은 누구보다 깨끗함을 잘 아는 사람이다. 더러움을 매만져 깨끗함으로 탄생시키는 것이 청소다. 청소를 하지 않는 사람은, 무엇이 깨끗한지, 무엇이 더러운지 알 길이 없다. 그냥 그렇게 있는 것이니까. 오직 청소를 하는 사람만이 더러움을 알고, 깨끗함을 안다.
어쩌면 '더러움'을 만지고 싶어 하지 않는 마음은, 사실 항상 '더러움'과 함께 하고 있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주은양은 환경미화원이 꿈이라고 했을까. 이유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아이의 주변 사람들은 적어도 쉽게 무언가를 비교하고 판단하지 않는, 그것을 그 자체로 완전한 것으로 보아주는 사람이라는 것은 엿볼 수가 있다. 글 쓰는 사람은 글 쓰는 게 전부고, 청소하는 사람은 청소를 하는 게 전부고, 음식을 만드는 사람은 음식을 만드는 게 전부인 것이다. 그래서 신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이 모든 것을 넣어주셨다. 우리가 지금 하는 일이 우리의 전부이니까. 뭔가를 '해야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 완전하게 존재하고 있는 사람이니까.
갑자기 집안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 몸에 더러운 것이 닿는 게 죽어도 싫다는 그 생각이, 오히려 내 몸을 더럽게 만들고 있게 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내가 싫어했던 것은 더러움이 아니라, 더러움을 치우기 위해 움직여야 하는 노동이었으려나.
그래. 쓸데없는 생각 말고 일어나서 청소나 해야지. 내가 세상에서 얼마나 대단한지, 못났는지, 잘 살고 있는지, 못 살고 있는지 비교하며 괴로워할 시간에, 그냥 일어나서 청소나 해야지. 때 중의 때는 내 주변을 굴러다니는 먼지가 아니라, 머릿속에 낀 세상의 잡념이겠거니, 그 시간에 청소기나 한 번 돌리는 게 더 알차겠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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