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결혼하면, 정말 잘 살다가 갑자기 남편이랑 아이를 버리고 긴 여행을 떠날 것 같아.”
친한 남자 동료들과 함께 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가던 중 던진 말이었다. 운전을 하지 못하는 나는 뒷좌석에 앉아 두 남자의 대화를 가만히 엿듣고 있었다. 아마 본인들의 여자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대화에 끼고 싶었던 나는, 불현듯 저런 뜬금없는 대사를 날렸다.
차 안의 공기는 급격하게 싸늘해졌다. 한 동료는 “너 진짜 무섭다”라며 마치 악마를 보았다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갑작스럽게 내뱉은 말이었지만, 나를 진심으로 두려워한 그 동료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2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의 장면은 누군가 계시한 ‘예언’이라도 된 냥 평범한 일상을 문득문득 깨뜨리는 파편으로 찾아오고 있다.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 예언은 진정 신의 계시가 될 것인가, 아니면 그저 한 순간의 실언으로 끝날 것인가.
하지만 여기, 그 잔인한 예언이 현실이 된 여자들이 있다. 남편과 아이를 버리고 긴 여행을 떠난 여자들. 그들은 왜 여행을 떠나야만 했을까. 그리고, 과연 자신의 가족을 모두 버리고 난 뒤 그녀들의 일상은 과연 행복할까.
앞자리에서 운전대를 잡고 여자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던 두 동료를 대신하여, 이제는 그녀들이 운전대를 잡기 시작했다. <델마와 루이스>, <와일드>, <노매드랜드>, <매드 맥스>, <겨울왕국>의 주인공들은 모두 자신을 옭아매던 것에서 벗어나 ‘나 자신’을 찾는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각자의 자리에서 운전대를 잡으며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6명의 여자들. 이들은 과연 어떻게 서로가 서로의 미래가 되어주며 성장 이후의 성장을 그려나갈 것인가.
여행을 나선 여자들: 가족을 버리고 운전대를 잡은 그녀는 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을까
가족. 가장 안전하고 편안한 울타리이자, 동시에 누구보다 자유를 억압하는 존재. 요람에서 무덤까지 그들은 물리적으로, 그리고 심리적으로, 우리 옆에 안착하여 보호자와 감시자의 역할을 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가족이라는 존재가 삶의 이유가 되기도 하지만, 남편과 아이를 버리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저 거대한 사적 억압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억압을 던져버린 두 여성의 강렬한 여행기 <델마와 루이스>는 페미니즘 영화의 대모라 여겨질 만큼 명확하고 견고하게 메시지를 던진다. 사근사근한 금발의 미녀에서, 어느덧 한 필의 야생마로 변해가는 델마의 성장은 이성애자 여성들의 마음마저 앗아가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해방과 연대라는 주제로 여성 서사의 거대한 산맥을 이룩하고 있는 이 영화는 한 인간의 성장기에서 극 초반의 유아기를 담당하고 있는 작품이다. 더욱 안타까운 지점은, 델마는 성장하였지만 정작 델마가 운전대를 잡은 자동차는 단 한 발자국의 액셀도 밟지를 못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금발의 미녀에서 야생마가 되었지만, 갇혀 있던 말이 어떠한 준비도 없이 광활한 서부의 사막에 내던져졌을 때의 결말은 날개 없는 말이 스스로를 허공에 내던지는 슬픈 도약일 뿐이었다.
델마와 루이스의 마지막은 처음부터 예견된 바였다. 자유를 찾아 떠난다는 설정과 달리 그녀들의 운전석은 화면의 오른쪽에서 출발한다. 왼쪽에서 잡은 운전대를 기준으로 정방향으로 달리는 보통의 로드트립 영화와는 반대되는 구조다. 즉, 이들의 여행이 ‘자발적인 출발’이 아닌, 무언가로부터 쫓기는 ‘타의의 질주’가 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타의의 질주는 델마가 영화 중반까지 놓질 못한 순진함과, 치유되지 못한 텍사스에서의 상처로 인한 루이스의 급발진, 그리고 찰나의 실수를 이용하여 이들을 계속해서 절벽으로 몰아넣는 남성들로 인해 시작된다.
델마는 ‘내던져진’ 인물이다. 영화 내내 자신의 삶을 위해 무언가를 결정하기 보다, 상황에 따른 변화와 직진을 감행한다. 그녀의 여행은 루이스의 제안으로 시작된다. 계속해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남성들의 유혹에 넘어간다. 여행이 도망이 된 이유 역시 결정적으로 루이스의 실수 때문이다. 강도가 된 것 역시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무마하기 위한 결심이었다. 그녀가 스스로 선택한 유일한 결정은 ‘죽음’. 이것 역시 경찰들의 압박 속에서 자신을 절벽으로 던져버린 델마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영화적 선택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녀의 해방은 ‘내던져진 자유’에서 온 해방이다. 델마는 자유를 충분히 즐기며 그 안에서 변화한 자신을 만났지만, 그 자유는 본인이 ‘선택’ 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그녀가 처음 만난 자유는, 어쩌다 보니 그녀에게 주어진 특별한 선물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녀가 운전대를 잡은 자동차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 첫 번째 이유가 되었다.
두 번째는 ‘연대’다. 델마와 루이스는 여성의 연대라는 강력한 키워드를 안고 대중의 사랑을 받은 영화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서로가 서로의 기둥이 되어주었기 때문에 그녀들은 스스로 일어설 시간을 갖지 못했다. 성폭력을 당한 델마를 루이스가 구해주었고, 데릭이 돈을 훔쳐 루이스가 무너지려 할 때 델마는 강도가 되어 루이스를 구한다. 어떤 사건으로 인해 주저앉게 되었을 때 우리는 보통 자력과 타력 사이에서 적절한 선택을 하며 다시 일어선다. 이때 ‘위기를 극복했다’라는 지점에 초점을 둔다면, 델마와 루이스는 어떻게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간 인물이 된다. 하지만, 위기를 ‘어떻게’ 극복을 했는가에 초점을 둔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들은 총을 사용하여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 이 영화의 모든 위기는 상황과 전략 파악을 통한 개척으로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무력을 사용하여 자신의 감정을 분출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델마와 루이스는 서로의 분출을 응원하며 힘이 되어준다. 서로의 잘못을 해결해주며 상황을 빠져나간다. 두 여성은 지리멸렬한 자책의 시간을 던져버리고, 서로의 해방을 응원하는 우정과 연대를 쌓아나간다.
연대는 힘이 있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 같을 때 내밀어진 타인의 손길은 나를 일으키고 전혀 바라보지 못했던 새로운 길을 안내해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지점에서 연대는 위험하다. 앞이 막혀 더 이상 갈 수 있는 길이 없을 때, 때로는 뒤를 돌아 내가 걸어온 길을 살펴볼 잔인한 고독함이 필요하다. 하지만 델마와 루이스는 서로의 고독을 채워주며 무작정 어딘가로 나아가기를 반복한다. 또한, 누군가 안내해준 길은 내가 개척한 길이 아니다. 내밀어준 손을 잡고 일어설 순 있지만, 그 손을 따라 같이 나아가는 것은 ‘나의 선택’이 아니라, ‘타인의 선택’이다. 그래서 이들은 결정적으로 자기 자신을 일으키고 내 삶을 위한 선택을 해야 했을 때, 내가 아닌 네가 내민 손을 잡고 나를 일으킨다. 내 삶을 향한 선택이 아닌 누군가가 던진 해결책에 그대로 자신을 내던지고 만다.
델마와 루이스는 해방과 연대라는 거대한 물결 속에서 아름다운 우정을 탄생시켰지만, 동시에 그 물결에 휩쓸려 자신의 삶은 먼 하늘로 던져지고 말았다. 이 영화가 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제를 던져버리는 해방감을 주요 감정선으로 둔다는 점에서는 정치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분명하다. 하지만 그녀들을 움직인 힘은 ‘부정’의 형태를 띠고 있다. 즉 무언가를 긍정함으로써 나아가는 엑셀이 아닌, 지금까지 살아온 그녀들의 일생에 ‘브레이크’를 밟아 어딘가를 가지 않음으로써 터뜨려진 힘이다. 그래서 그녀들의 자동차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두 페달에 모두 발을 뗀 상태에서 의지 없이 어딘가로 흘러가던 과거에 제동을 걸었을 뿐이다.
하지만 처음으로 스스로 키를 넣어 시동을 켜본다. 운전대를 잡아본다. 그녀에겐 힘이 있다. 어딘가로 출발할 수 있는 의지가 있다. 자,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남편도, 아이도 없이 홀로 잡은 운전대가 비상하다.
*다음 편에선 영화 <와일드>와 <노매드랜드>를 통해 운전대를 잡고 여행을 떠난 여자들의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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